보후슬라프 마르티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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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후슬라프 마르티누는 체코의 작곡가로, 다양한 장르에서 4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신고전주의, 체코 민족주의, 재즈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결합하여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리듬감, 다채로운 관현악법, 서정적인 선율이 특징이다. 마르티누는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성악곡 등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특히 6개의 교향곡과 다양한 협주곡이 유명하다. 그는 1940년대 미국 망명 시기에 창작 활동의 정점을 맞았으며, 말년에는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다. 마르티누의 전기 작가 F. 제임스 리브카는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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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슬라프 마르티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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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보후슬라프 마르티누는 체코, 파리,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며 다양한 음악적 영향을 받은 작곡가이다. 그의 생애는 각 지역에서의 활동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2. 1. 체코 시대 (1890-1923)

마르티누는 1890년 보헤미아(Bohemia)의 폴리치카(Polička)에 있는 성 야곱 교회(St. Jakub Church) 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장인이자 교회 종지기였으며, 마을의 소방 감시원으로도 일했다. 마르티누는 어릴 적 허약하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05년 고향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열었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1906년 프라하 음악원(Prague Conservatory)에 입학했다.[1]
프라하 음악원에서 마르티누는 엄격한 교육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라하를 탐험하며 스스로 배우는 것을 즐겼다.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많은 음악을 암기하고 악보를 거의 완벽하게 적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교정 불가능한 태만"으로 1910년에 퇴학당했다.[2]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티누는 음악계에서 자리를 잡으려 노력하며 작곡 활동을 계속했다. 요제프 수크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교사로 일하면서 보헤미아 형제단(Bohemian Brethren)의 고대 합창 성가를 연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가 독립 공화국으로 선포되자, 마르티누는 칸타타 '체코 랩소디(Česká rapsodie)'를 작곡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1920년에는 바츨라프 탈리히(Václav Talich)가 이끄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zech Philharmonic)의 정회원이 되었고, 수크에게 정식 작곡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첫 번째 현악사중주곡과 두 개의 발레를 완성했다.
2. 2. 파리 시대 (1923-1940)
마르티누는 1923년 체코슬로바키아 교육부로부터 소액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알베르 루셀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루셀은 마르티누에게 특정 스타일을 가르치기보다는 작곡에 집중하고 질서를 잡도록 도왔다.[3] 파리에서 초기 몇 년 동안 마르티누는 재즈,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경향을 작품에 통합했다. 그는 특히 스트라빈스키에게 매료되었다.[3] 그의 실험을 위한 매체는 발레였으며, ''반란''(1925), ''도장을 찍은 나비''(1926), ''Le raid merveilleux''(1927), ''La revue de cuisine''(1927), ''Les larmes du couteau''(1928) 등이 포함된다. 마르티누는 파리의 체코슬로바키아 예술계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항상 고향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여름에는 자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음악적 아이디어를 위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민요를 참고했다. 이 시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체코 민요와 자장가를 통합한 발레 Špalíček(1932–33)이다.1926년 마르티누는 프랑스 재봉사 샤를로트 퀘네앙(1894–1978)을 만났다. 그들은 1931년 결혼했다.[5]
1930년까지 마르티누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1932년 그는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현악 6중주곡으로 쿨리지 상을 수상했다.[6] 1936년에 조르주 느뵈의 초현실주의 연극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줄리에타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1938년 3월 14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1937년 마르티누는 젊은 체코 여성 비체슬라바 카프랄로바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샤를 뮌슈에게 지휘를 배우고 마르티누에게 작곡을 배우기 위해 체코 정부의 소액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왔다. 그들의 관계는 그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사제 관계를 넘어섰다.[7] 마르티누가 이 시기에 그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 피아노 및 팀파니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뮌헨 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며칠 전(1938년 9월 30일) 완성되었다.[7]
뮌헨 협정 이후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프랑스와 영국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군대가 체코 저항군으로 조직되자 마르티누는 그들에게 합류하려고 했지만 나이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러나 1939년 그는 이 부대를 기리는 ''야전 미사''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영국에서 방송되었고 점령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수신되었다. 이 때문에 마르티누는 나치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결석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마르티누 부부는 도망쳤다.[8]
2. 3. 미국 시대 (1941-1953)

1941년, 마르티누는 나치의 유럽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15] 미국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예술가 이민자들에게도 어려웠다. 영어를 모르고, 자금이 부족하며, 재능을 사용할 기회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문제였다.[10]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마르티누 부부는 57번가에 있는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 스튜디오 아파트를 빌렸다. 그들은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시니(Rudolf Firkušný), 바이올리니스트 사무엘 두슈킨(Samuel Dushkin), 첼리스트 프랭크 리브카, 외교관 밀로시 샤프라넥, 그리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변호사 얀 로벤바흐를 포함한 여러 음악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10] 마르티누는 시끄러운 맨해튼에서는 작곡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리브카 부부 가까이에 있는 퀸즈의 자메이카 에스테이츠(Jamaica Estates)에 작은 아파트를 빌렸다. 이 녹음이 우거진 주택가는 그가 밤에 오랫동안 혼자 산책을 하며 머릿속으로 악보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음악에 대해 깊이 집중하여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길을 잃기도 했으며, 그러면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찾아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10] 그 후, 그는 활발하게 작곡하기 시작했다. 세르게 쿠세비츠키에게 연락했을 때, 지휘자는 그의 그로소 협주곡이 다음 시즌 보스턴에서 초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티누가 뉴욕에서 처음 쓴 작품 중 하나는 전쟁 전에 파울 자허로부터 의뢰받았던 바이올린과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실내 협주곡(Concerto da Camera)''이었다.[11] 다음 해, 그들은 플라자 호텔 맞은편 58번가에 있는 브라운스톤 아파트로 다시 맨해튼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그들이 미국에서 남은 세월을 보낸 곳이다.
1940년대 미국 체류기는 그의 창작 활동의 정점에 해당하며, 6개의 교향곡 중 5개를 이 시기에 작곡했다.[15] 1945년, 체코가 해방되자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수락 후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
1946년 여름, 쿠세비츠키의 의뢰를 받아 탱글우드 음악 센터의 하계 강좌 강사를 맡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서즐스 성(Searles Castle, Massachusetts)의 학생들과 함께 숙소를 제공받았고, 그의 침실은 테라스로 통했다. 어느 날 밤, 마르티누는 난간이 없는 테라스를 걷던 중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두개골 골절과 뇌진탕으로 입원했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지만, 퇴원 후에도 두통, 이명, 난청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13]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풍은 점차 가벼운 것으로 변해갔다.
가정 문제 외에도 마르티누는 어느 나라에 살지 확신하지 못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로 인해 귀국 계획은 더욱 어려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음악과 다른 예술은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른 선전 도구가 되었다. 마르티누는 형식주의자이자 망명자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고국에서 어떤 종류의 직업적 활동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4] 1947년 교향곡 제5번 초연에 작곡가 대리로 참석하기 위해 프라하를 방문한 그의 부인은 서보헤미아의 예술가 마을에 귀국 후 거처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권이 탄생하고, 문화 정책에 이해를 보였던 얀 마사리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귀국을 단념했다.
마르티누는 1952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15]
그는 1948년부터 1956년까지 대부분 매니스 음악대학(Mannes College of Music)에서 강의했다. 그는 또한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16]와 버크셔 음악학교(탱글우드)에서도 강의했다. 프린스턴에서는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942년부터 1953년까지 11년 동안 6개의 교향곡 중 5개를 작곡했다. 또한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오케스트라를 위한 ''Památník Lidicím|리디체 추모비cs'',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실내 협주곡(Concerto da Camera)'', ''라호야 신포니에타(Sinfonietta La Jolla)'',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2번과 제3번, 많은 실내악 작품, 그리고 텔레비전 오페라인 ''결혼(Ženitba)''를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 악보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시카고 등 대부분의 주요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주요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르티누의 방대한 작품 양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질적으로 부주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를 알고 있던 음악가와 비평가들은 그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올린 다운스는 마르티누를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인터뷰를 위해 친구인 얀 로벤바흐를 통역으로 참석하게 했다. 다운스의 작곡가에 대한 옹호는 "60세의 마르티누"라는 기사에 실렸다.[17] "마르티누 […]는 철저하지 않거나 양심적이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매우 열심히,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겸손하게 일한다. 그는 본래 그의 성격이 이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음악을 작곡한다.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의 일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이다."[18] 작곡가 데이비드 다이아몬드는 파리와 뉴욕에서 모두 마르티누를 알았다. 수년 후 인터뷰에서 그는 산책을 하면서 전체 오케스트라 악보를 구성하는 마르티누의 놀라운 정신에 놀라움을 표했다.[19]
마르티누의 주목할 만한 제자로는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 앨런 호바네시안(Alan Hovhaness), 비체즐라바 카프랄로바(Vítězslava Kaprálová), 루이스 레인(Louis Lane), 얀 노바크, H. 오웬 리드(H. Owen Reed), 하워드 샤넷(Howard Shanet)과 저우 웬중(Chou Wen-chung)이 있다.
1953년, 마르티누는 미국을 떠났다.
2. 4. 유럽 시대 (1953-1959)
1953년, 마르티누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 니스(Nice)에 정착하여 《교향적 환상곡(Fantaisies symphoniques)》을 완성했다.[20] 이듬해 그는 《미란돌리나(Mirandolina)》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고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를 만나 《그리스의 수난(The Greek Passion)》 작업을 시작했다. 1955년에는 오라토리오 《길가메시(Gilgames)》, 오보에 협주곡,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화(Les Fresques de Piero della Francesca)》, 칸타타 《오트비라니 스투다네크(Otvirani studanek)》(샘의 개방) 등 몇몇 중요한 작품을 창작했다. 샤를 뮌슈(Charles Munch)가 보스턴에서 《교향적 환상곡》 초연을 지휘했고, 이 작품으로 작곡가는 뉴욕 비평가상을 수상했다.[20]1956년, 로마 미국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in Rome)의 상주 작곡가로 임명되어 《주술(Incantation)》(그의 네 번째 피아노 협주곡)과 《그리스의 수난》의 대부분을 작곡했으며, 이듬해 1월에 완성했다.[20] 얀 스마즈니(Jan Smaczny)는 마르티누의 말년 작품에 대해 "우리는 작곡가가 그의 음악을 통해 대리적인 귀향을 시도하는 것을 발견한다"고 언급했다.[21] 비록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1958년 오케스트라를 위한 《우화(The Parables)》와 오페라 《아리아네(Ariane)》로 이어졌다. 이듬해 그는 프라하 초연 이후 비스바덴에서 《줄리에타(Julietta)》의 첫 공연에 참석했다. 그의 죽음까지 작곡은 계속되었는데, 《그리스의 수난》 두 번째 버전, 9중주곡, 마드리갈, 그리고 칸타타 《미케슈 즈 호르(Mikeš z hor)》(산에서 온 미케슈)와 《이사야의 예언(The Prophecy of Isaiah)》[20]("마르티누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고 개성적인 작품 중 하나"[22]) 등이 있다.
1959년 8월 28일, 스위스 리에슈탈(Liestal)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23] 1979년, 그의 유해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리치카(Polička)로 옮겨져 매장되었다.[23]
3. 주요 작품
마르티누는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성악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4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다작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930년대까지의 제1기, 1940년대 미국 체류 시기인 제2기, 유럽으로 돌아온 후의 제3기로 나뉜다. 특히 미국 체류 기간은 그의 창작 활동의 정점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6개의 교향곡 중 5개가 작곡되었다.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에는 피아노가 거의 항상 포함되어 있으며, 하프시코드와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규모 협주곡을 포함하여 피아노를 위한 중요한 파트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작품 대부분은 신고전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마지막 작품에서는 더욱 랩소디적인 표현과 자유로운 형식 감각을 보여주었다.
마르티누는 지인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은 위촉 작품이다. 특히 기교를 발휘하기 위한 협주곡이 30곡 가까이 작곡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반면, 20세기 작곡가에게 중요한 분야인 영화 음악은 창작 제1기에 5곡만 작곡했다.
말년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작품에 반영되어,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음명 상징이나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레퀴엠에서 「키리에」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1. 오페라
《Julietta영어|Juliettacs》(1938), 《그리스 수난》(1961, 유작), 《결혼》(1953) 등의 오페라 작품을 남겼다.[20]3. 2. 교향곡
마르티누는 6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처음 다섯 곡은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에서 작곡되었다.[16]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제6번 "교향적 환상곡"은 1953년에 작곡되었다.[16]- '''교향곡 제1번''' (1942년): 쿠세비츠키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앙세르메는 이 작품의 유럽 초연을 지휘하며 "그의 세대에서 가장 진정한 교향곡 작곡가다"라고 칭찬했다.
- '''교향곡 제2번''' (1943년): 클리블랜드에 거주하는 체코인 노동자들을 위해 작곡되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지만, 소규모 악기군이 번갈아 등장하는 실내악적인 구성을 띄고 있다.
- '''교향곡 제3번''' (1944년): 쿠세비츠키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활동 2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악화되는 전쟁 상황을 반영한 듯 축제 분위기는 없으며, 2악장은 비통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 '''교향곡 제4번''' (1945년): 제3번과는 대조적으로 전쟁 종결의 기쁨이 넘쳐흐르는 듯 표현되어 있으며, 특히 느린 악장인 3악장은 서정성이 풍부하다.
- '''교향곡 제5번''' (1946년): 제2회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초연되었고,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헌정되었다.
- '''교향곡 제6번 "교향적 환상곡"''' (1953년): 미국 체류 중에 완성하지 못한 유일한 교향곡이다. 작곡가 자신은 이 작품을 제6번이라고 부르지 않고 "3개의 교향적 환상곡"이라고 명명했다. "환상 교향곡"이라는 제목도 고려했지만, 베를리오즈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철회했다. 1955년에 초연되어 뉴욕 비평가 클럽상을 수상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이 작품에 대해 "얼마나 풍요로운 세계인가. 앞으로 50년 더 살 수 있다면 마르티누의 모든 작품을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3. 3.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925년): 1925년 여름 폴리치카에서 작곡되었다. 1928년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25]
; 피아노 협주곡 제2번 (1934년, 1944년 개정)
: 루돌프 피르쿠시니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다.[25]
; 피아노 협주곡 제3번 (1937년, 1942년 개정)
: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기교적인 작품이다. 제2악장에서 드보르자크의 레퀴엠 주제가 인용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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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돌프 피르쿠시니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다. 오케스트라를 축소하고 타악기와 하프를 추가했다.[20][25]
;
: 마르그리트 뷔베르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다.[25]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1933년)
: 파리에서 작곡되었으나, 원고를 분실했다. 하지만 원고는 후에 미국에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1973년 요제프 수크에 의해 초연되었다.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에너지 넘치는 작품이다.[25]
;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1943년)
: 미샤 엘만의 위촉으로 작곡된, 노래와 기교가 가득한 낭만주의풍의 협주곡이다.[25]
; 협주적 모음곡 D장조 (바이올린 독주) (1939년)
: 원곡은 피아노 반주가 있는 실내악으로 작곡되었고, 1945년 오케스트레이션되어 협주곡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협주적 이중주곡』을 의식하여 작곡된 기교적인 작품이다.[25]
; 랩소디 콘체르토 (비올라 독주) (1952년)
: 비올라 협주곡 중 몇 안 되는 중요한 레퍼토리이다.[25]
; 첼로 협주곡 제1번 (1930년)
: 완성 후에도 오케스트레이션의 변경이 자주 이루어졌다. 마르티누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25]
; 첼로 협주곡 제2번 (1945년)
: 제1악장의 서정적인 선율은 체코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장황함을 포함하여 작곡가의 향수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초연은 마르티누 사후인 1965년 프라하에서 사샤 베치토모프와 즈데네크 코슈라에 의해 이루어졌다.[39] 이 외에도 첼로 협주곡으로는 “피아노, 관악기, 타악기를 위한 첼로 소협주곡 H.143 (1923)”, “소나타 다 카메라 (1940)” 두 곡이 있다.[25]
; 현악사중주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31년)
: 프로 아르테 현악사중주단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다. 콘체르토 그로소를 의식한 작품으로, 1932년 동 단체와 새전트 지휘, 런던 필에 의해 초연되었다.[25]
; 바이올린과 피아노, 타악기를 위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토 다 카메라 (1941년)
: 자허의 위촉에 응하여 작곡되었다.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마르티누의 합주 협주곡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도 높다.[25]
; 협주적 교향곡 제2번 B♭장조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파고트 독주) (1949년)
: 드물게 조성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하이든의 같은 이름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며, 독주 악기 또한 같다. 마르티누는 이 무렵 하이든의 교향곡을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고, 작품 자체도 하이든을 연상시키는 명랑한 음악이다.[25]
;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복협주곡 (피아노, 팀파니 독주) (1938년)
: 제2차 세계 대전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25]
; 오보에와 소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955년)
: 오보이스트 이르지 탄치부데크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다. 마르티누 말년의 작풍으로 쓰여진 명랑한 곡이다.[20][25] 위촉자는 호주로 망명한 사람이며, 아델레이드에서 초연되었지만, 공산당 정권 하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내에서도 이 곡의 인기는 높았고, 연주 또한 일찍부터 묵인되었다.
3. 4. 관현악곡

마르티누는 400여 곡을 작곡한 다작 작곡가였다.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의 특징은 피아노가 거의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많은 오케스트라 작품에는 하프시코드와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규모 협주곡을 포함하여 피아노를 위한 중요한 파트가 들어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그의 작품 대부분은 신고전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마지막 작품에서는 그의 스타일을 확장하여 더욱 랩소디적인 제스처와 더 느슨하고 자발적인 형식 감각을 포함시켰다.
- '''리디체를 위한 추모곡(Památník Lidicím)''' (1943년): 1942년 7월 나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체코 마을 리디체를 추모하는 곡이다. 마르티누가 뉴욕에 있을 때인 1943년 8월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10월 뉴욕에서 초연되었다.[28]
- '''썬더볼트 P-47'''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로펠러 전투기 "리퍼블릭 P-47 썬더볼트"를 가리킨다. 교향곡 제3번의 스케르초와 동시에 구상되었다.
- '''심포니에타 라 호야''' (1950년): 샌디에이고 근교 마을 라 호야(La Jolla) 음악예술협회로부터 위촉받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의 색채를 지닌 3악장 작품이다.
-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Les Fresques de Piero della Francesca)''' (1955년): 1954년 이탈리아 여행 중 아레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중앙 예배당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십자가 이야기」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하프를 포함하는 4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다.
- '''오케스트라를 위한 우화''' (1957년): 생텍쥐페리의 「성채」를 바탕으로 한다.
3. 5. 실내악
마르티누는 8개의 현악 사중주를 포함하여 다양한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24]제목 | 연도 |
---|---|
현악 사중주 1번 | 1920 |
현악 사중주 2번 | 1925 |
현악 사중주 3번 | 1929 |
현악 사중주 4번 | 1937 |
현악 사중주 5번 | 1938 |
현악 사중주 6번 | 1946 |
현악 사중주 7번 "협주곡 다 카메라(Concerto da Camera)" | 1947 |
3. 6. 성악곡
-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기념으로 작곡된 칸타타 체코 광시곡(1918)
- "전쟁터의 미사"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에서 결성된 체코인 반나치 의용군을 위해 작곡된 《야전 미사(1939)》는 교향곡 제3번, 실내 협주곡, "리디체를 위한 추모곡"과 함께 전쟁 연작을 구성한다.[20]
- 칸타타 《세 개의 빛의 산》(1954)
- 길가메시 서사시의 체코어 번역을 바탕으로 【1. 길가메시/2. 엔키두의 죽음/3. 기도】의 3부로 구성된 오라토리오 《길가메시(1954~1955)》[20]
- 칸타타 《샘 열림》(1955)[20]
- 칸타타 《이사야의 예언》(1959)[20]
- 무반주 합창을 위한 5개의 체코 마드리갈 (1948)
4. 음악적 특징 및 평가
마르티누의 음악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체코 민족주의 음악, 특히 모라비아 민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재즈, 인상주의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흡수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리듬의 다양성과 생동감, 다채로운 관현악법, 서정적인 선율 등이 특징이다. 20세기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연주되고 있다.[25]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의 특징적인 요소는 거의 항상 존재하는 피아노이다. 그의 많은 오케스트라 작품에는 하프시코드와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규모 협주곡을 포함하여 피아노를 위한 중요한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그의 작품 대부분은 신고전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는 더욱 랩소디적인 제스처와 더 느슨하고 자발적인 형식 감각을 포함하도록 그의 스타일을 확장했다. 이것은 그의 ''환상 교향곡''(Symphony No. 6), H 343을 1940년대에 작곡된 이전 다섯 곡과 비교하면 가장 쉽게 알 수 있다.
마르티누의 덜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테레민을 특징으로 한다. 마르티누는 1944년 여름에 테레민, 오보에, 현악사중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작업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완성했다. 그는 이 곡을 루시 비글로우 로젠에게 헌정했는데, 그녀는 이 곡을 의뢰했고 1945년 11월 3일 뉴욕의 타운 홀에서 있었던 초연에서 테레민 독주자로 참여했으며, 쿠첸 사중주단, 로버트 블룸(오보에), 카를로스 살제도(피아노)가 함께했다.[26][27]
그의 오페라 ''그리스의 수난''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였고, 그의 관현악곡 ''리디체 추모곡'' (Památník Lidicím)은 1942년 늦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에 의해 파괴된 리디체 마을을 기념하여 작곡되었다. 이 곡은 그가 뉴욕에 있는 동안 1943년 8월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뉴욕에서 초연되었다.[28]
얀 스마즈니(Jan Smaczny)는 마르티누의 말년 작품에 대해 "우리는 작곡가가 그의 음악을 통해 대리적인 귀향을 시도하는 것을 발견한다"고 언급했다.[21]
5. 논란: 아스퍼거 증후군
마르티누의 전기 작가 프랭크 제임스 리브카(Frank James Rybka)는 마르티누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했다.[29] 리브카는 1941년 마르티누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51년과 1959년에 다시 만났다.
리브카에 따르면, 마르티누는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감정 표현이 둔했다. 그는 모국어인 체코어로 대화할 때도 질문에 매우 느리게 대답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호의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30] 그러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친절하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편견 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2009년, 리브카는 마르티누를 알았던 사람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그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연구하여 마르티누의 특이한 성격에 대한 회고 연구를 시작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증거를 수집하고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IV)의 기준을 사용하여 평가했다. 저명한 자폐증 신경과학자가 이 증거를 검토한 결과, 마르티누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마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31]
2011년, 리브카는 마르티누의 전기를 출판했다. 이 전기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려움, 둔한 감정 표현, 공포증과 심한 무대 공포증, 규칙적인 일상에 대한 엄격한 고수, 작곡에 몰두하며 걷는 동안 멍한 상태에 빠지는 등의 특징들이 자세히 검토되었다.[32] 전기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마르티누의 삶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미쳤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놀라운 음악적 기억력과 다작하는 능력을 향상시킨 반면,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거나 선보이는 데는 어려움을 겪게 했다.[33]
그러나 에릭 엔트위슬(Erik Entwistle)은 리브카의 출판물에 대한 비평에서 리브카의 결론에 반대하는 세 가지 주요 점을 지적했다. 첫째, 사망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를 진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아스퍼거 증후군은 공식적으로 별개의 증후군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엔트위슬에 따르면 리브카는 마르티누의 장애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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